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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묵]주민번호 개혁, 인식부터 바꿔야


연이은 개인정보유출 사건에 따른 정부 당국의 후속 조치들이 속속 나오고 있지만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미봉책'이라는 생각이다.

주민등록번호 대체 수단 확대, 개인정보보호법 제정 연내 추진 등에 이어 고객 동의 없이 개인정보를 위탁했을 경우 형사처벌에 처하도록 하는 법안이 통과됐지만 주민등록번호 제도를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고민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전 국민의 나이와 생일, 성별 등 주요 정보가 담긴 개인식별번호의 유출 규모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만 1천만여 건. 실제는 그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 국민의 3분의 1에 가까운 주민등록번호가 허공에 떠다니고 있는데 원론적인 대책만 되풀이하고 있다.

정부 당국의 입장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식별번호 제도를 바꾸는 것은 국가의 운영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일이다. 손질해야 할 관련 법안만 산더미다. 새 부처가 생긴 지 고작 3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주민등록번호 개혁'이라는 큰 사안은 난제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제도를 존속해야 한다는 정당성을 입증하지는 못한다. 언제 할 것인가. 더 많은 명의 도용, 보이스 피싱 등으로 전 국가적인 혼란이 일어나야 손 볼 것인가.

훗날 정보화 시대에 이 제도가 문제가 될 줄 몰랐을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국민과 함께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면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어도 고치지 않는 정부 당국자들에게는 후손들이 책임을 물을 것이다.

하지만 제도 개혁에 있어 선행돼야 할 것은 국민들의 의지와 인식 변화다. 제도를 바꾸는 데 드는 물리적 노력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안의 굳은 인식, 문화와의 싸움이다.

주민번호가 유출된 후 일부 시민들이 행정안전부에 요구한 것은 '주민번호 폐지'가 아닌 '변경'이었다. 이 제도가 워낙 한국인에게 '물과 공기'와도 같아서 그에 대한 문제제기조차도 제도를 기정사실화하는 범위 안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굳어 있는 인식이란 이처럼 무섭다.

'제도'보다 더 위에 있는 '문화'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어느 독일인에게 '독일에서 인터넷 회원 가입할 때 따로 개인식별번호를 입력하지 않아도 된다면 청소년을 음란물에서 어떻게 보호하냐'고 물으니 그의 답이 걸작이다. "굳이 보라고 하지는 않지만 독일인들은 봐도 별로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애들도 호기심을 별로 안 느껴요. 어차피 성교육을 일찍 시작하니까."

한국의 온라인 홈페이지에서 개인식별번호제도를 사용하도록 하는 중요한 논거 중 하나가 어느 나라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미성년자들은 성인물을 보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평범한 한국 사람의 생각에는 너무도 생경한 말이다.

국민들은 지금부터라도 주민등록번호의 '맨살'을 바라봐야 한다. 국가가 '광우병 위협'으로부터 나의 건강권을 침해하려는 데 분개했듯이, 우리가 숨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레 여기는 주민등록번호 제도가 자신의 정보자기결정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해야 한다. 나로부터의 인식 변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정병묵기자 honnezo@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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