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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균성] 방송의 공공성 포기가 그리는 사회


시청률은 방송 광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오직 그런 이유로 시청률은 방송 프로그램의 존폐를 가르는 핵심 요소다. 시청률이 조금만 떨어진다 싶으면 봄과 가을로 돼 있는 정기개편과 상관없이 막을 내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로 인한 폐해는 누누이 지적돼 왔다. 방송 제작진은 어떻게든 튀어 보이려 한다. 큰 돈 들이지 않고 튀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막말이나 선정적인 내용처럼 인간의 마초심리를 자극하는 것이다. 방송에서 여성의 나체 위에 스시를 올려놓고 먹을 만큼 초현대적인 마초 방송도 봐야만 했다. 우리는 이런 프로를 흔히 ‘저질’이라 부른다. 그러나 욕먹는 프로가 시청률도 높고 돈도 많이 버는 일이 의외로 많다.

그나마 이런 게 논란이라도 되는 까닭은 방송의 공공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 때문일 것이다. 공공성은 안방이나 거실에 놓이게 되는 TV 수상기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방송은 국가 자원인 전파를 이용해 일방적으로 콘텐츠를 송출하는 형식인데, 누구나 볼 수 있고 여럿이 같이 본다. 그런 매체 속성 때문에 공공성이 부여된다.

대중에게 무차별적이고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파급효과를 갖는다는 뜻이다. 그 파급효과는 사회 공공의 선을 지키고 수렴하기 위해 쓰여야 한다는 것이 상식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고 그래서 사회적 합의라 할 수 있다. 방송에 대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법제를 만들어왔던 까닭도 그 때문이다. 소수의 이해를 위해 엄청난 파급력이 독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사적 자본에 의해 운영되고 원하는 사람만 폐쇄된 공간에서 은밀하게 즐기는 특성을 갖는 매체에 대해서 우리는 굳이 공공성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 매체의 경우 오히려 공공성보다는 창의성과 상업성을 더 많이 요구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방송의 공공성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뜻이다. 공영방송이라는 개념처럼 방송의 소유 형태를 공공화한다거나, 방송통신심의위원회처럼 지속적으로 방송 내용을 심의하는 기구를 두고, 아예 편성 및 제작 단계에서부터 시민을 참여시킨다고 해서 공공성의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노력을 안해온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방송의 공공성 시비는 끊이지 않고 재생산 돼왔다. 방송의 파급효과가 워낙 큰 만큼 공공성을 사유화하려는 침탈 요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송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거의 유일한 길은 민주 공화주의를 유지 발전시키려는 노력 못지않게 사회 각 분야가 지속적인 참여와 관심을 보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한다고 쉽사리 되는 일도 아니다. 사회 각계가 방송의 공공성을 아주 절실한 자신의 이해관계로 인식하고 또 그 느린 발전과 진보를 절대 믿어 의심치 않아 지속적이고 전폭적으로 참여할 때 비로소 일말의 가능성만을 갖게 되는 험한 길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어떤가. 비아냥거리고 싶진 않지만 “방송, 그거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뭘 그리 시끄럽게 하는지 모르겠어.” 하는 수준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종류의 비아냥거림이 공공성의 사유화에 대한 지지 발언으로 여겨지고 그 힘을 바탕으로 공공성보다는 상업성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방송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공공성을 위한 법제도에다 사회 각계의 지속적이고 전폭적인 참여가 이루어져도 확보될까 말까 할 공공성이라는 난제를 두고 시민은 그냥 비아냥거리고 정부는 상업적으로만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하는 것이다.

특히 정책 조류가 급속히 그런 방향으로 흐른 까닭은 방송과 통신의 융합이라는 기술적 트렌드와 무관치 않다. 진보적인 기술의 출현으로 인해 사회과학적 의미에서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콘텐츠가 합쳐지는 게 대세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 융합이 기술적 상업적 자본적 요구에 의해 출발하고 또한 진행된다는 점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방송의 공공성을 침해하는 방향과 일치한다. 따라서 융합 문제를 대할 때는 과거보다 더 공공성 확보에 대한 치밀한 방안이 요구된다고 봐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지금 상황으로 보면 공공성은 그저 허무한 ‘말’일 뿐이다. 어쩌면 공공성은 이제 포기되어도 좋은 세상이 됐다고 보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세계적인 미디어 그룹’ 육성이라는 정책 목표 또한 그렇다. 국내에서조차 공공성을 확보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세계적인 미디어 그룹’이 공공성을 고민할 리 만무하다. 엄청난 자본을 투여할 것이고 그 제일의 목적은 뻔하다. 자본의 확대 재생산이다. 앞의 시청률 논리에서 보듯 미디어는 자본의 확대 재생산을 위해 복무할 것이고, 사실 그게 전부인 것이다.

그 결과는 아주 뻔하다. 재능 있는 자는 더 잘 살고 재능 없는 자는 더 굶주리는 세상이다. 굶주리면서도 TV가 보내는 허구를 통해 섹시한 모습에 침 한 번 흘리고 나면 다시 힘겨운 하루를 더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세상이다. 그건 많은 사람이 마초에 농락당하는 이유기도 하다.

그것은 이미 백년지대계라 하는 교육에 있어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내 자식이 잘 되면 그만이지 다른 아이 걱정할 틈이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 결과 100중 50이 잘되면 큰 문제는 없겠다. 적어도 과반수는 되니까. 그러나 그런 생각이 관철되는 부류는 100중 많아야 10~20이다. 80~90의 아이는 물론이고 그런 아이를 거둬야 하는 80~90의 부모는 거의 매일 눈물을 흘려야한다.

그런데도 그게 좋다고 그쪽으로만 달려가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흔히 나만은 최악의 상황을 면할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것이 20-80을 구별하는 이데올로기에 표를 던지게 되는 이유다. 뛰어난 20%가 못난 80%를 먹여 살린다는 생각도 그런 논리다. 하지만 그런가. 혹시 못난 80%가 뛰어난 20%에게 제 가진 모든 것을 몰아주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가설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쟁이 있고 그 가설을 증명할 방법을 무능한 필자로서는 증명해낼 수가 없다.

다만 이건 말할 수 있다. 누구나 다 나는 적어도 20%에 속할 것이야, 하고 생각하지만, 장담컨대, 이 글을 보는 당신은 80%일 가능성이 20%일 가능성보다 많다. 그래서 당신이 지금 괴로워하는 것 아닌가. 섹시에 눈길 한 번 줘도 괴로움이 가시지 않는 당신, 진짜 그렇다면, 과격할 만큼 충분히 당파적이어도 아직 부족하다.

이균성기자 gslee@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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