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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성]"차내에 계신 승객 여러분....."


불황 한파가 닥쳐서인지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의 들뜬 기분이 남의 일 마냥 어색하기만 한 어느 날 오후. 취재 약속이 있어 서둘러 지하철에 몸을 싣고 초초하게 시계만 바라보다 깜박 잠이 들었다.

"차내에 계신 승객 여러분, 잠시 소란을 끼치게 돼 대단히 죄송합니다!"

갑자기 들려온 우렁찬 한 남자의 목소리에 선잠을 깼다. 지하철 안에서도 최근들어 부쩍 늘어난, '눈물없인 팔 수 없는 부도난 중소기업의 상품' 판매인가보다 하는 생각에 짜증 섞인 한숨이 나왔다.

힐끔 바라보니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정중히 허리를 숙이는 30대 후반 가량의 남자가 눈에 띈다. 그가 입을 연다.

"저는, 한 중견 기업의 영업사원으로서 나름대로 훌륭한 성과를 올리며 승승장구 했었지만, 그만 회사의 부도로 얼마 전 실직을 하게 됐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그럼 그렇지. 대게 저렇게 시작하는 사연이 그 기업에서 피땀흘려 개발한 아이디어 상품을 눈물을 머금고 천원에 판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지하철 안 승객들도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채 그 커다란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여전히 힘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제가 영업맨으로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입니다. 얼굴도 모르는 여러분들이지만, 오늘 제가 힘을 내기 위해서 이렇게 지하철에 나와 인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힘 내십시오. 나라가 어렵지만 우리 내년에는 잘해봅시다. 저도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연설'을 마친 후 차량 이 쪽 끝에서 저 쪽 끝까지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힘 내십시오'를 외치면서 한 사람 한사람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천원짜리 아이디어 상품은 꺼내 들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계속 인사를 하고 있었다.

한 두 사람이 조용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곧 차량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보냈다. 한 중년 신사는 자기가 인사를 받을 차례가 오자 벌떡 일어서서 악수를 청했다. 서로가 "힘 내십시오. 잘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주고 받았다.

그는 그렇게 인사를 마친 후 옆 차량에 연결된 문을 열고 넘어갔다. 곧 희미하게 "차내에 계신 승객 여러분..."하는 그의 '연설'이 다시 시작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년 세계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것이라고 국제금융연합이 전망했다. 국내 시장도 꽁꽁 얼어붙을 것이라는 예측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2009년에 대한 희망은 찾아보기 어렵다.

얼어붙은 국내 IT 시장을 살려보자고 정부가 팔을 걷었지만 업계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하다. 소프트웨어 기술자들의 경력을 증명해 주겠다며 새 제도도 시행하고 대기업을 일부 제한해 중소기업의 먹거리를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각양각색의 이유를 들어 '반대'만 빗발친다.

반대하는 이들에게 '대안'을 물었더니 딱히 대안도 없다고 한다. 다만 시장이 어려운데 어설픈 정책으로 기업과 개발자들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으니 현행이 최선 아니겠느냐는 답이 돌아올 뿐이다. 정말 그럴까.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깊숙이 자리잡은 패배 의식이 이처럼 부정적인 반대만 앞서게 하는건 아닐까.

실제 지하철의 선잠을 깨운 한 남성의 짧은 연설은 실직과 부도, 사상 최악의 취업난 속에서 불투명한 재취업 등 불안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줬다.

하지만 그의 연설에는 이에 지지않고 맞서 이겨나가리라는 긍정적인 마음가짐도 함께 담겨 있었다.

그는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우연히 그의 연설을 들은 기자를 비롯, 그 차량 안의 승객들에게 '모르는 사이에 젖어있던 패배의식'을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처럼, 다시 한번 힘을 내야겠다는 작은 각오를 다지게 했기 때문이다.

강은성기자 esther@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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